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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즈유고] ⓒ리운님 - N시손님과 유고씨 (폴리바 강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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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씨,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제가 그렇게 물으니, 유고 씨는 그저 가만히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의 유고 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N시 손님과 유고 씨 w. 리운 *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이미네 마이입니다. 열 다섯살 난 칠드런이지요. 세간에서는 다들 열 다섯살이라고 하면 어린애가 하는 말이 무어 그리 대단하겠냐며 콧방귀를 뀌겠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UGN에서 줄곧 싸우며,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걸요. 죽음과 삶 사이에서 옳음과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이 오버드의 사명이라고. 그러므로 마음이 꺾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유고 씨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끝으로 끝으로 떠밀려도 곁에 있는 모두를 의지하며, 스스로가 마음으로 믿는 것을 기억하라고요. … 아니, 여기까지 말했는데, ‘유고 씨’가 누구냐니요! 이제 오신 것도 아니면서 그것부터 물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유고 씨의 이름도 모른 채로 여기에 있으셨다고요! 바로 UGN의 일본 지부장이신 키리타니 유고 씨를 말하는 겁니다! 버거운 싸움을 계속하면서도 신념과 희망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모두를 이끌어주시는 바로 그 ‘리바이어선’ 말이지요. 다정하고, 엄격하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십니다. …으음,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시군요. 안 그래도 오늘은 유고 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당신을 불렀지요. 어어, 졸지 말고 제대로 들어보십시오! * 다시 이어가서 말입니다, 유고 씨는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진 사람입니다. UGN에 남아있는 모든 오버드들의 스승이자, 친구이자, 선배이자, 영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요? 저야 당연히 유고 씨를 무척 좋아하지요! 그야, 저를 죽음에서 구해주셨는걸요. 유고 씨는 그 일 탓에 종종 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지만, 저는 무척이나 괜찮습니다. 죽음보다는 삶이 나은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혹시 그 날 유고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고 씨 옆에서 일을 도울 수도 없었을 테지요. 그런 걸 보면 그 날 구해지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옆에서 잔심부름을 할 뿐이라…. 아시다시피, 1년 전 그 날 이래로는 UGN의 상황이 마땅치 않으니 말입니다. 정확히 잘은 모르지만, “로드 오브 어비스”가 일본 지부로 닥쳐와서…. ‘페이트 인디케이터’와 함께 정신없이 피난하고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되어서…. 상황이 엉망이 된 것은 얼마 후였습니다. 대부분의 동료와 헤어져, 이제는 곁에 있는 이들이 몇 남지 않았지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오버드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일이 너무도 빠르게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일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제가 유고 씨의 일을 직접 도와드리는 것은 쉽지 않지요. 제가 무엇을 해도 되냐고 물어도, 유고 씨는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슬픈 표정을 지으시면서요. “‘무한거울’, 침식을 관리하시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다른 분들이 귀환하시는지, 탐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런 부탁을 받을 때가 참으로 슬픕니다. 저를 마이가 아니라 코드네임으로 부를 때요. 그것은 제가 해야하는 일이 제 호의가 아니라 임무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임무를 위해 나간 사람과 복귀하는 사람의 수가 다를 때, 그것을 유고 씨에게 말해야 하는 역할을 제가 맡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엔젤헤일로가 정탐에 능하다는 것이야 당연하니까요. 그러니 임무 하달이 아니라 부탁이었대도 저는 그 명령을 들었을 텝니다. 그러나 유고 씨는 이제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적습니다. 그러면 다른 분들도 무척 슬픈 얼굴을 합니다. 매번 죄송하다고 사과하십니다. 오버드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그럼에도 사과하십니다. 그리고, 유고 씨도 미안하다고 사과하십니다. 아주 슬픈 얼굴을 하시고서요. 무엇을 그분들이 제게 미안하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고 씨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저도 싫습니다. 아주아주 싫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이즈루 씨’가 무사하신 건 다행이었습니다. 네에. 코드네임 “Páros”인 그 에이전트가 맞습니다. 제가 이즈루 씨를 편하게 부르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유고 씨에게 정식으로 소개받은 두번째 오버드셨거든요—첫번째는 당연히 ‘리바이어선’, 유고 씨 본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제 교관님이기도 하셨고요. 그러니 기실 벌써 몇 년을 가까이에서 뵙고 있으니 당연히 친할 수밖에 없지요. 아주 우수하고, 현명하신 분입니다. 유고 씨가 제 아버지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라면, 이즈루 씨는….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같은 존재일까요? 다정하고 상냥하기도 하시고요! 하지만, 제가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즈루 씨가 현명하고 강한 오버드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유고 씨와 이즈루 씨는 무척 친하십니다. UGN 일본 지부가 세워졌을 때부터의 사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두 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고 씨는 이즈루 씨에게, 이즈루 씨는 유고 씨에게 도움이 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래오래 함께하셨으니까요. 일본 지부에 더는 발을 들일 수 없게 된 이후로, 이즈루 씨와는 그 날 일본지부에서 본 것이 마지막일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날, 이즈루 씨는 제게 S시의 일리걸들을 만나고 오겠다고, 항전중인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유고 씨를 저와 다른 에이전트께 맡기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는 N시에 우리가 몸을 숨긴 이후로도 한참을…. “...이즈루 씨!” “귀환이 늦어져서 미안하구나, 마이. 그리고….” “…….” 조금 지친 얼굴로 이즈루 씨가 폐건물에 걸어오신 것은 그 때였습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지요. 하지만 조금 이상했습니다. 모든 에이전트들이 이즈루 씨를 감싸고 다행이라고, UGN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며 환호하던 중에서도 유고 씨는 언제나처럼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 대신 한참을 입을 다물고 이즈루 씨를 바라보고만 계셨습니다. 유고 씨? 고갤 돌려 유고 씨의 이름을 부르니 유고 씨는 파드득 정신을 차리시고서는 이즈루 씨에게 다가가 포옹하셨습니다. 가쁜 숨을 파르르 내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Páros.” “자네를 기다리게 했나 보군.” ‘네, 기다렸습니다.’ 하고 담담하게 내뱉으시며, 유고 씨는 그 순간 실로 오랜만에 웃으셨습니다. 이상하지요. 유고 씨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모두를 대하시는데도, 저는 유고 씨가 아주 오랜만에 웃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일까요?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이즈루 씨가 돌아오시고 나서는 UGN의 공기가 퍽 변하였습니다. 여전히 전투만 일어나면 에이전트든 칠드런이든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지는데. 그런데도 유고 씨가 슬픈 얼굴을 덜 짓게 되었습니다. 저는 왜인지 궁금하면서도 그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고 씨께 여쭈어보아도 언제나 ‘마이가 열심히 우리를 도와준 덕분이겠지요. 감사합니다.’ 그리 되려 제게 인사를 하시는데…, 저는 그러면, 무어라 대답을 해야할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유고 씨가 저를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 정도는 해야지요. 생명의 은인이시니까요.” 그리 대답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고 씨는 그저 손을 뻗어 제 머리를 쓰다듬으실 뿐입니다. 그러다보면 이즈루 씨가 유고 씨를 방문하여 전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고요. 허나, 그거 아십니까? 유고 씨는 매번 이즈루 씨와 이야기를 나누시면 웃지 않고 딱딱한 표정만 짓고 계십니다. 이즈루 씨와 유고 씨가 대화하시면서 싸우시는 모양인가봐요. 언성을 높이시는 일이야 없으니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전황이 그리 좋지 않으니 일본 지부를 짊어지는 두 분의 의견 대립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래도 말입니다. 두 분은 매번 싸우시는데도요. 두 분은 침식치가 한계까지 오르셨거나, 전투에 의한 부상자 치료가 필요한 재정비 기간에는 당연하다시피 함께 계십니다. 화해가 빠르신 걸까요? 한날은 임무 보고를 위해 유고 씨를 방문하는데, 낡은 문이 삐걱이며 잘 열리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고 문을 망가뜨릴 수는 없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잔뜩 투덜거리고 있는데, 그제서야 문이 덜컥 열려버려서 방 안으로 우르르 쏟아지듯 들어간 적이 있었지요. 그 때에는 정말 생소한 것을 보았습니다. 유고 씨가 이즈루 씨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계셨습니다. 전투 후에 엉망이 된 후에도 누군가에게 부축 받는 일은 잘 없으신 유고 씨가요! 저는 유고 씨가 실은 어디 알지 못한 곳이 크게 다치셨나 해서 감각을 곤두세우려는데, 이즈루 씨가 그런 저를 보고서, ‘마이.’ 하시는 겁니다. 유고 씨는 그때까지도 이즈루씨에게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않으시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저를 보셨습니다. 이런, 유고 씨는 이즈루 씨에게도 기대고 있는 것에 성이 많이 나셨던 모양입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고 계시던 유고 씨는 제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제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서 저를 보았습니다. “마이, 상황 보고를 위해 왔습니까?” “네에.” 제가 다른 에이전트들의 회복 상태를 조잘거리자, 유고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셨습니다. 무심코 저는 유고 씨가 아니라 이즈루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즈루씨는 손을 뻗어 손으로 내 뺨을 감싸주었습니다. “마이는,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저는 괜찮습니다! ‘오니유리’ 씨께서 커버링을 해주신 덕에….” “다행이구나.” 그리 이즈루 씨의 손길을 받고 있다 보면, 역시 유고 씨가 이즈루 씨와 있을 때마다 성을 내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요. 이즈루 씨는 이렇게나 상냥하신데도요. 일전에는 그래서 여쭤본 일이 있었습니다. 유고 씨는 이즈루 씨를 좋아하시지요, 하고요. 그러니 유고 씨는 퍽 당혹스러운 듯이 얼굴을 굳힌 채 물론이지요,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누구를 보더라도 방긋 웃으시는 유고 씨가 어째서 이즈루 씨와 대화를 할 때마다 딱딱하고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이 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은 아주아주 오래 함께 지냈으면서요. 역시, UGN을 걱정하시는 두 분이다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싸움이 잦아질 수밖에 없는 걸까요? 그러면서도 유고 씨가 이즈루 씨께 비타민을 전해드리라고 매번 제게 부탁하시는 걸 보면, 사이가 영 나쁘신 것은 아니셨겠지요? 이즈루 씨께 유고 씨께서 비타민을 보내셨다고 말씀드리니, 이즈루 씨는 언제나처럼 미소지으시며 비타민 병을 손에 꼬옥 쥐셨습니다. 저는 고맙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이즈루 씨의 손길을 받으며 히히 웃었습니다. * 두 분은 언제나 침착하고 진중하신 편이라, 소리 높여 성을 내신 건 ‘그 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날이라고 함은, '오르페우스'와의 격전 날 말입니다. 더이상 '테르프시코레'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신 날. 그리하여, UGN의 별이 또 하나 스러진 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오신 유고 씨가 구멍이 뻥뻥 뚫린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평소였다면 괜찮다고, 우선 쉬라고. 회복을 중점으로 생각하고 다음의 기회를 잡아내자고 말하실 유고 씨였는데도, 그 때에는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압니다, 그 때에는 제가 조금이라도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저는 유고 씨 곁에 갈 수 없었습니다. ‘테르프시코레’는 저를 지켜주려 하셨습니다. 줄곧 나더러 피하라고…. 그러니 저는….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이즈루 씨가 박수를 두 번 치셨습니다. 오늘의 전투의 결과는 쓰라린 패배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이즈루 씨는 차분하고, 하지만 확실하게 모두를 이끄셨습니다. 회복을 돕고, 물자를 나누고, 전황을 확인하면서요. 저 역시도 이즈루 씨를 도왔습니다. ‘테르프시코레’ 덕분에 아직 저는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움직이자, 에이전트들의 불안하신 목소리도 잦아든 듯 했습니다. 저도 모두가 축 처진 분위기에서도 다음 전투를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테르프시코레’께서 돌아오지 못하신만큼, 공격 증폭에 대한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겠다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이즈루 씨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는요. “자네는 틀리지 않았네.” 저는 어쩐지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유고 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테르프시코레’에게 후퇴하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리바이어선’.” “하지만, 예. 우리에게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지요….” “...그렇지.”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 ‘오르페우스’ 앞이므로 더더욱….” “자네는 어둠을 비추는 별이지. 그러니 자네의 눈에는 더 선명히 보이는 거야.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이.” “이즈루 씨, 저는….” 조근조근 이어지는 두 분의 대화를 어째서 《토끼의 귀》를 써 가면서까지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순간 들어버린 이상 꼭 홀려버린 듯이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정답이었을까요.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이즈루 씨가 단호하고 성난 목소리로 내뱉으셨습니다. 절망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되네. “압니다.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래도…, 자네는 결국 털고 일어나리라 믿어. 모든 결실을 맺을 때까지.” “…….” “내가 곁에 있겠네, 유고.” 저는 그 즈음에는 눈물이 자꾸만 나서 훌쩍이며 저어 멀리로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만 으악 하고 울고 싶어졌습니다. 괜찮아, 속삭이던 ‘테르프시코레’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요즘 들어 희망을 속삭이던 유고 씨의 목소리가 몹시도 슬프게 들린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념이고 뜻이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고 씨가 울거나 슬픈 목소리가 되면 나 역시도 견딜 수 없이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 목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돕고 싶었습니다. 어느샌가 제게 다가와 속삭이신 이즈루 씨의 말씀에 고개를 마구 끄덕여버린 건 그 때문입니다. “마이, 리바이어선의 곁에 있어주렴. 네가 그가 힘들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어야지.” “네에, 이즈루 씨.”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종종 저는 임무 중에 본 풀꽃이나 새싹을 꺾어 유고 씨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마이, 이런 꽃을 어디에서 가져오셨습니까? 퍽 푸르르군요. 옅게 미소짓는 유고 씨에게 저는, 혹여나 길에서 꽃을 꺾어서 왔다고 하면 유고 씨가 혼을 내실까 싶어—그게, 제가 어릴 적에 꽃을 꺾으려 들면 제 부모님이 매번 혼을 내셨단 말이지요.— 이즈루 씨가 갖다 주라 하셨다고 전해버렸습니다. 거짓말을 내뱉어버린 것이 바로 들켜버린 탓일까요? 유고 씨가 퍽 곤란하신 낯으로 그 꽃을 한참을 매만지시는 겁니다. 저는 그래서 임무가 있다고 꽁무니를 내빼버렸지요. 다행이게도 유고 씨는 작은 꽃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뿐으로, 도망치는 저를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 그 날에는 유고 씨가 내 손을 쥔 채로 아무 말도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 날이 아니더라도 유고 씨는 곧잘 웃지 않으시게 되었습니다. ‘오니유리’ 씨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신 날부터 였는지, 아니면 다른 에이전트 분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신 것 때문인지. 아니면 가장 멀쩡하던 아지트에서 도망쳐나와 더 작은 폐건물로 들어가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그 아지트에는 유고 씨가 홀로 지낼 수 있는 독실이 없는데, 이제는 모두가 한 방에서 나와서 쪽잠을 자도 공간이 널널해져버린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UGN은 아래로, 저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은유가 별이라고 곧잘 이야기하는 모양입니다만, 일상의 희망이던 UGN의 추락은 유성마냥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니었습니다. 그 별똥별도 가까이에서 보면 거대하고 엉망인 바위가 불타는 모습이라고는 하지만요. 그리하여, 그 추락 속에서 모두가 침잠한 채로 고요했습니다. 창문 바깥에는 FH의 테러리스트 격퇴 성공에 대한 축하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네에, 이즈루 씨는 제법 현상금이 비싸셨으니까요. 아마 그런 때문이겠지요. 유고 씨는 언제나처럼 회복과 이후의 방침에 대해서 일러주시다가도, 더 무슨 말은 않고서 자리에 앉지도 않으신 채로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저는 유고 씨에게는 창문 바깥의 빵빠레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창문을 다시금 꼭꼭 닫고서 유고 씨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혀 드렸습니다. 유고 씨는 한참을 꿈결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유고 씨.” “마이.” 네에, 하며 고개를 들고 유고 씨를 바라보았는데, 유고 씨의 뺨을 타고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먼지와 검댕이 가득 묻은 얼굴에 땀인지 눈물인지가 흐르며 검게 변색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매를 끌어당겨 그 눈물을 죽죽 닦아드렸습니다. 제 후드 집업이 검은 색이라 다행이었지요. 소매 끝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티가 많이 나진 않았거든요. “…미안합니다.” 저는 유고 씨가 무엇을 미안해하시는지 몰라 그저 고개를 몇 번 내저었습니다. 유고 씨의 함뿍 젖은 눈꺼풀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러면 괜히 또 눈물이 났습니다. 이즈루 씨를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마 유고 씨도 그리하여 자꾸만 자꾸만 우셨던 거겠지요. 그렇게 슬퍼하실 때에는 어떻게 힘이 되어드릴 수 있었을까요? 이즈루 씨를 핑계로 꽃을 꺾어드릴 수도 없는데. 곁에 있겠다는 말처럼 의미 없는 문장이 없잖습니까. 오버드는 결국에는 죽는걸요. 반절은 사람으로, 반절은 졈으로. 의미없는 문장이었음에도 내뱉었어야만 했던 걸까요? 유고 씨를 위해서? 곁에 남은 이는 이제 몇 없으니까…. “...미안해요. 하지만, 포기할 수는….”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네?” 유고 씨는 젖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셨습니다.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의 짐을 이어받아버렸다고. 이즈루 씨가 마지막으로 해준 그 말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슬퍼져서 잔뜩 훌쩍이며 웅얼거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괜찮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말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았습니다. 유고 씨가 무사하시니까요. 유고 씨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제가 살아있는 거라면, 제가 살아있는 이상 유고 씨의 신념 역시도 살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기어이 이 싸움이 끝나는 날이 온다면, …. 파도소리가 저 멀리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곳은 도시 교외인지라, 파도 소리가 들릴리 없는데도. 그 너머로, 또각, 또각, 하고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습니다. * 사실, 있지요. 제가 ‘릴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FH를 향한 복수심이 아니었습니다. 스러져간 가족이나 나를 지키며 제 몸이 꿰뚫리던 동료들의 뜻을 이어가고 싶었음이 아니었습니다. 더이상 나를 이 인간으로 묶어둘 인연들이 남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 이젠 유고 씨마저 죽어버릴까 두려웠던 게 아닙니다. 며칠 전에 말입니다. 이제는 한산해진 아지트에 앉아 계신 유고 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고 씨는 종이에 계획을 바쁘게 연신 써내려가면서도 망가진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런 허망한 절박함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S시에 향하셨던 이즈루 씨의 귀환을 기다리던 때의 유고 씨였습니다. ‘유고 씨,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그렇게 물으니, 유고 씨는 그저 가만히 웃음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의 올려다보았던 유고 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진득한 울음과 비슷했습니다. 그 때 제 소매에 묻었던 시커먼 먼지나 재 같은…. 영영 흐르지 못하는 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났습니다.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그 사람이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리운 사람들이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면, 직접 만나러 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족쇄 전부 끊어서라도. 키리타니 유고는 별이시잖습니까. 모든 이들은 한 하늘 아래에 있다고들 하니까. 어디론가 줄곧 달려간다면 유고 씨가 보고싶을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하여 저와는 영영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리하여 다시 만난 이들을 끌어안고 가쁜 숨 내쉬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어서. 그리고 기어이 웃으시라고. * “그래서 말입니다…, 유고 씨는 잘 넘어가신 걸까요?” 레니게이드 바이러스가 공기중에 가득 차서, 더이상 일상은커녕 사람조차도 남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거울들이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멸망과 존속 사이의 어드매를 바라보는 말간 얼굴은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킨 사람 치고는 천진한 낯을 하고 있었다. 관객마냥 늘어뜨려놓은 작은 돌멩이 몇 개를 발 끝으로 톡 건드려보며 어린 괴물이 물었다. “소중한 이들을 만나셨을까요? 이즈루 씨도 그렇고, 다들 유고 씨를 기다리게 하시니까요.” “......” “그러게 말입니다! 그곳에는 이즈루 씨가 계실 테니까요. 그곳에서는 싸우지 말고 웃으셨으면 좋겠는데….” 먼지와 잔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무너진 벽에 기대어 앉은 아이미네 마이가 한참을 재잘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