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 째깍.
초침이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어둑한 식당 내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적힌 안쪽 공간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공간. 밖에서 본다면 영락없이 영업을 종료한 가게. 문 닫은 상가 주변을 거닐던 인영이 돌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보랏빛 머리를 풀어 헤친 그림자가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밀고 들어간다. 잠겨 있지 않았던 문은 부드럽게 밀려난다. ‘Close’라고 쓰인 팻말이 흔들림과 동시에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흐아암~⋯, ⋯응?”
일련의 행위를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해낸 사람, 유우나기 호무라가 하품하며 식당에 딸린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니, 어둠 속에서 보이는 어슴푸레한 불빛 쪽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동시에 눈이 가늘어지고, 성큼성큼 다가가 ‘관계자 외 출입 금지’가 적힌 문을 열었다.
“집주인 지부장~⋯ 아직 안 자?”
“유우나기 씨.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늦으셨군요.”
문이 열리면 환한 빛과 함께 내부가 드러난다.
식당과 연결된 곳이라곤 할 수 없는 단정한 집무실의 모습. N시의 지부장실이다.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던 백발의 남성이 웃는 낯으로 대꾸한다. 그에 상대 역시 취기 오른 모습으로 기분 좋은 티를 내다가, 문득 시계를 본다.
“오늘따라 술이 더 잘 들어가더라고~ 그나저나, 아직도 일해?”
“검토할 서류가 남아서요.”
“벌써 3시가 넘었는데??”
“4시 전까진 끝나지 않을까 싶군요.”
“어이구, 이러다가 지부장 다크서클이 사라질 날은 영영 없겠네~”
염려가 담긴 말이란 걸 알기에 지부장이라 불린 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여성 쪽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가, ‘과로로 쓰러지게 되면 병원에 가야 하니까 자길 불러라’ 하곤 그녀에게 배정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부장실의 문이 닫히면 다시 정적이 이어진다. 지부장, 센리 이즈루는 끌어 올렸던 입매를 내리고 다시 눈앞의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후 FH와의 교전이 예상되는 위치를 짚은 내용에서 손끝이 멈춘다. 서류 넘기는 소리가 멈추면 시계 초침만이 공백을 메꾼다. 전술에 대한 검토를 반복하던 그가 잠시간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것은 반추가 맺는 상이다.
~§~
“이번 전투에서 제 복제체로 추정되는 자와 교전했다고 하셨지요.”
“⋯예, ‘리바이어선’.”
맞은 편에서 시선이 닿아오는 게 느껴졌다. 며칠 전에 벌어진 FH와의 대규모 전투. 관련 서류가 지금 리바이어선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미 한 차례 서면보고가 완료된 건이지만, 호출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리바이어선’의 복제체라면, 하물며 그자의 진영이 펄스 하츠에 있다면. UGN에서도 한가로이 다룰 사안은 아니기에.
“‘릴리스’라⋯ 얄궂은 작명이군요.”
키리타니 유고는 잠시 서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가, 재차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교전의 여파가 아직 남은 것인지, 정돈된 낯 사이에 피로가 배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브리핑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는 점은 그다웠다.
교전 당시의 내용을 보고하고 대응책에 관해 의견을 내는 동안, 센리 이즈루는 제 기억을 들춰보면서 동시에 ‘릴리스’의 속삭임을 되새겼다.
‘당신의 판단이 어그러지는 때가 올 거예요. 그날이 기대되는군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벌어질 일을 예언하는 듯한 문장. 그는 그것이 거슬렸다. 그래서 모든 의견을 낸 말미에, 문장을 맺지 않고 눈앞의 상대를 호명했다.
“⋯리바이어선.”
“예, 파로스.”
“⋯⋯.”
잠시간의 간극. 그는 제 친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디어 잭 이후로 이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나날에 일본 지부는 잔뜩 날을 세운 채였다. 내일 있을 습격에 대응할 전술은 이미 수십 번을 추산하고 검토했다. 오차는 반올림한다면 0.1% 정도에 달하는 수치.
간교한 뱀의 언급만으로 그에게 고민을 더해야 하는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사안을. 하물며 명확한 해결법도 없는 심리적 요인 탓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드물게도 말을 번복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피로했나 봅니다.”
간극을 알아챈 키리타니 유고의 시선이 잠시 진득하게 달라붙었으나, 곧 서류를 두어 번 책상에 두드릴 뿐이었다. 추궁하는 대신, 공적인 용건이 끝났다는 알림이자 환기였다. 그가 아는 파로스는 증거 없는 불확실한 명제에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캐묻기보다 판단을 존중하는 것. 그것은 신뢰로 맺어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려주었다.
“⋯이즈루 씨, 또 밤을 샜습니까?”
“임무 종료 후 있을 칠드런의 훈련 스케쥴 조절이 남아서.”
“때로는 적절한 휴식도 중요합니다. 교전의 피로도 남으신 듯한데요.”
“자네가 과로로 나에게 한 소리 할 줄은 몰랐군.”
“하하. 그도 그런가요.”
요즘 같은 상황에 휴식이란 꿈같은 단어임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구태여 염려를 입에 올리는 것은 임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위함일 터. 센리 이즈루는 손으로 한 번 얼굴을 쓸어내리곤 미소 지으며 답했다.
“장기적으로 무리가 될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예, 믿고 있습니다.”
미소에 미소로 화답하는 상대와 인사를 마치고, 그는 일본 지부 내에 있는 본인의 숙소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살피면, 시간은 밤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걱정시킨 만큼, 내일 일정을 위해서 오늘은 너무 늦지 않게 취침할 계획을 세웠다.
다만, 며칠 새 겪고 있는 껄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 내일 있을 전술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를 몇 차례. 현시점에서 더 보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상되는 각종 변수는 상황에 맞추어 플랜 D까지 마련해 둔 참이다. 상정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응대는 전부 갖춰졌다⋯.
남은 건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하지만 전장에서는 언제나 예상 밖의 상황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이번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날 확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머릿속 그래프를 굴리던 그가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목 안쪽부터 달라붙는 불안감. 속삭임을 회고하며 그가 헛웃음 지었다. 입안에 날카로운 칼과 독을 품는 것만큼은 ‘그’라고 할 수 있군. 머릿속에서 떠올린 말을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작전 당일에 전술을 전부 갈아엎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남은 건⋯
전선에 나서는 아이들을 믿는 것.
의자에 기대어 길게 숨을 내쉰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이 데록 굴러 시계 쪽으로 향한다.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 양손으로 한 차례 얼굴을 덮었다가 떼어낸다. 생각에 마침표를 찍고 결론 내렸다.
풀리지 않는 고민을 접어두고,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에게는 마침 다음 일이 눈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아이들의 훈련 스케쥴. 마무리 검토만 끝내면 될 것이다.
센리 이즈루는 지부의 교관 중에서도 도맡고 있는 칠드런이 많은 편이었으나, 개의치 않다는 듯이 전부 제 아이처럼 가르쳤다. 책장에서 파일철을 한 아름 꺼내 들어 책상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학습일지’라고 적힌 파일들. 빼곡하게 적힌 글씨와 정리된 내용에서 묻어나는 애정.
시계의 시침이 2를 넘어서기 전, 교관은 일지에 스케쥴표를 정리하는 것을 파일철의 전체 개수만큼 끝냈다. 일과의 종료였다.
그리고 그 파일철 중에 2/3는, 다시는 쓰이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
UGN 산하 병원. 그중에서도 중환자를 돌보는 병실.
문을 열면, 아이미네 마이는 그곳에 있었다. 전투에서 벌어졌던 최악의 변수를 운 좋게 비껴간 아이는 졈화도, 사망도 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마치 그 대가인 것처럼 한쪽 눈은 피 맺힌 붕대로 감싸였다. 영구한 손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치의는 그리 말했다. 아이가 누운 침대 곁에 서 있던 센리 이즈루는 무언가가 목을 콱 움켜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침대 난간 위에 올린 손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칠드런은 연고가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도 교관뿐이다. 당연하게도.
센리 이즈루는 생존한 칠드런들의 상태를 살피며 병실을 옮겨 다녔다. 개중에는 전투 당시에 생존하였다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사망한 경우나, 하루아침에 동료를 잃고 뒤집힌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울분을 토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버드는 모두 죽지 않습니까?”
“⋯⋯.”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어린 네가 그 말을 할 상황을, 또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실에 익숙해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입에 올리는 일을⋯⋯.
원망받을 각오를 지니고 도착한 곳에서 사랑스러운 제자는 오히려 부족한 자신을 자책하거나, 이처럼 위로를 건네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잃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면면이 눈에 밟혀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참담한 감정을 기워 엮은 사죄가 흘러나왔다.
“⋯⋯미안하구나.”
그의 손끝은 차마 아이에게 닿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는 그 감정마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상실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연약한 껍질을 둘러싸 방어기제로 덮어낸 그 모습 앞에서, 센리 이즈루는 표정을 갈무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
며칠 사이 부쩍 안색이 좋지 않은 상대에게, 키리타니 유고는 진정에 도움이 되는 차를 내밀었다. 사건의 수습을 마무리 지은 뒤, 파로스 쪽에서 독대를 요청해 왔다. 그의 행적을 보고받으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입이 열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센리 이즈루는 눈앞에 놓인 찻잔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파문이 이는 찻물에 피로한 기색의 남자가 비쳤다.
“갑작스럽게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리바이어선’.”
“편히 말씀하시지요.”
잠시간 찻잔을 매만지던 남자는 곧 한 모금을 겨우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속으로 넘어가면, 그제야 말하기를 허락받은 사람처럼 말문이 트인다.
“제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예상했던 이야기에 키리타니 유고는 살짝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걸 본 상대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리바이어선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을 피워낸다.
“교관뿐만 아니라, UGN 활동 전반.”
“파로스.”
“제가 맡던 일에 대해 인수인계 적임자는 리스트로 추려보았습니다.”
“이즈루 씨.”
상대에게서 호명이 달라지자, 서류를 건네던 자가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돈다. 그답지 않았다. 얼마 전 벌어졌던 일련의 사고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유라 생각되면서도, 일견 성급하게 여겨졌다. 상대가 멈춘 틈에 말을 덧붙였다.
“다시 생각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미안하네, 유고. 내가⋯자신이 없군.”
“⋯⋯.”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키리타니 유고는 눈앞의 남성을 재차 바라보았다. 부쩍 다크서클이 늘고, 꾸며낸 미소조차 짓지 못하는 듯이 버석한 상대는 힘주어 쥐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당장 붙잡지 못하고 유예를 건넨 것은 그 탓이다.
“⋯언제든 빈자리를 다시 채워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네.”
돌아올 것을 상정하는 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한 줌 남은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인지.
인수인계 리스트는 완벽했고, 거기에 그가 돌아올 자리는 없었다. 건네준 사람도 건네받은 사람도 그를 알았으나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
찻잔 속 찻물만이 떠나는 뒷모습을 상으로 맺을 뿐이었다.
~§~
“센리 선배.”
인수인계 중에 금발의 여성은 한 번 흐름을 끊고 그를 불렀다.
남성은 그 부름에서 방금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른 주제가 나올 것임을 알아차렸음에도, 그저 상대를 응시했다. 이어 말해도 된다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데굴 굴러 맞은편의 안색을 살폈다. 그린 것처럼 웃는 상대는 초연한 듯, 혹은 매우 피로한 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하려던 말을 무심코 삼켰다.
‘방패이기를 그만두실 생각이십니까?’
‘교관 일 말고도, 주위 사람들에게 인수인계를 넘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와바나 베니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 속에 어떤 말을 품었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센리 이즈루는 잠시간 제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곤 그저 한 문장을 내뱉었다.
“⋯이와바나 양은 좋은 교관이 될 겁니다.”
굳은 심지와 단단함을 안다. 긍지를 갖고 나아가는 발걸음은 눈부시다. 정체된 자신보다 더욱 걸맞은 인재이리라.
반쪽을 잃고 생겨난 FH에 대한 높은 적대감 역시, 올바른 방향으로 풀어나갈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오랜 경험에서 쌓여온 확신에 가까운 것.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 남자는 자신이 계속해서 보아온 사람을 믿기로 했다.
부드러운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반짝이는 이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다는 마음. 동시에 상대라면 같은 일이 생겨도 견딜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이 공존했다.
이와바나 베니네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10년이 족히 넘은 세월이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기엔 서로가 그 무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한 마디를 더했다.
“전향하실 일은 없길 바라요.”
“하하.”
“무기를 겨눌 상대가 둘로 늘어나는 건 사양이거든요.”
“그 정도로 무너지진 않았습니다.”
불신 어린 시선이 닿았으나, 그마저도 으쓱일 뿐이다. 책임을 이기지 못한 자이니, 어떤 시선이 닿아도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그래. 다시는, 방패를 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수호라는 이름의 닻에 매여있던 남성은 한동안 정처 없이 떠돌았다. 우습게도 세상은 언뜻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아침에 뜨는 해는 아름다웠고, 거리엔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가득했다. 그리고 새순이 피어나듯 웃고 있는 어린 생명은 사랑스러워 눈길이 갔다. 자신은 변한 게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향수병이었을까. 3개월을 꽉 채우기도 전에 그는 여행을 마치고 고향 땅을 밟았다. 하지만 일본 지부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아 부러 N시에 터를 잡았다.
여행 중 알게 된 한국 음식을 토대로 장사를 해볼까. 큰 고민 없이 결정했고, 가게로 쓰기 적당한 부동산 매물을 찾아 발품을 팔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FH의 습격. 일상이 무너지는 소리.
사건의 시작을 보고와 함께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 그는 현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행해왔던 것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FH의 빠른 제압을. 일상의 수호를.
그를 행하기 위해 모인 것이 UGN이기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겠지.
“파로스⋯, 파로스 아니십니까?”
“너는⋯⋯”
잊을 수 없는 얼굴 중 하나. 교관으로서 처음 맡았던 칠드런 기수 중 한 명. 이제는 어엿한 에이전트가 되었으나 여전히 앳된 기가 남은 얼굴을 보았다. 상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반겼다가, ‘파로스’의 현 상황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비장해졌다.
“힘을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참전은 당연히⋯⋯”
“지휘관이 필요해요. N시는 며칠 전 지부장이 공석이 된 상태입니다.”
“⋯⋯.”
⋯지부 관련 정보를 외부인에게 함부로 유출해선 안 되네. 우습게도 그런 말이 먼저 나왔다.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외면할 수 없는 부탁이라고. 한 번 손을 뻗으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고.
후회라는 이름으로 뿌리친 닻을, 스스로 매어두게 되리라고.
하지만 깨끗한 낯이 그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변치 않는 신뢰를, 그리고 언젠가 센리 이즈루가 건넸던 애정을 이번에 되돌려주듯이.
“지금은 제가 임시 지부장 대리입니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예상보다 더 명쾌하고 시원한 답이어서였는지, 알량한 책임마저 상대가 가져가 버려서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남은 미련이었는지. 잠시간 침묵하던 사람은 결국 입을 열어 답했다.
“⋯현 상황을 알려주게.”
~§~
한 번 협력한 이상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자리를 비울 순 없었고, 자연스레 일본 지부에도 ‘파로스’의 정보가 들어갔으리라. 그 증거로 그는 지금, N시에 내려온 일본 지부장과 독대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N시의 피해를 예상보다 축소할 수 있었다는 점일까.
두 사람 앞에는 똑같이 차가 내어져 있었고, 차이점을 꼽자면 이번엔 센리 이즈루 쪽에서 일본 지부장에게 대접하는 쪽이었다. 대화에 앞서서 차를 들이켜는 키리타니 유고의 낯을 살피면, 제 오랜 친우는 마지막 기억보다 좀 더 수척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상대는 그에 개의치 않고 서두를 꺼냈다. 담담하게.
“다시 결심하셨다고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솔직히 말해도 괜찮겠나?”
“예.”
“그냥 몸이 먼저 나갔네. 거창한 결심도, 비장한 포부도 없었지.”
“그렇습니까.”
자신의 전술이 N시의 궤멸을 막는 것에 일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꼭 초심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결과 하나에 손끝이 저릿해지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괜스레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제 앞에 놓인 찻물을 들이켰다.
이야기를 들은 상대는 무엇이 웃긴 것인지 조금쯤 미소 지은 채였다. 그것이 의아하여 시선을 두고 있으니, 잠시 후 눈이 마주쳤다.
“아,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서요. ⋯이즈루 씨는 변치 않았군요.”
“⋯⋯그런가. 나는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르지.”
“안심이 되는 이야기군요.”
상대는 말을 마치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짧게 음미하다 목울대가 넘어가면, 곧은 시선이 돌아온다. 그가 이곳까지 찾아왔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하리라고 예측하였지만. 이것마저도 반대 상황의 연속이라 참으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UGN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
하지만 질문을 예측하는 것과, 그에 답이 바로 나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 그래서 잠시간 말을 골랐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고, 키리타니 유고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를 기다렸다.
“교관으로 돌아가긴 어려울 듯하네.”
적성에 맞지 않았느냐고 하면 아니, 반대다. 개화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즐겁다. 열매가 영글기까지 이끌어주는 것은 보람찬 일이다. 그렇기에 한껏 애정을 주고, 그렇기에 상실에 면역이 생길 수 없었다. 비슷한 일을 또 겪었을 때, 자신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스스로 예측이 가능했다.
그것은 상대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곳이 마음에 드셨나요?”
“나이를 먹어서인지, 외국보다는 고향 땅에 터를 잡고 싶더군.”
“그렇다면, 이곳을 지켜주시겠습니까?”
“⋯⋯N시를?”
“마침 갑작스럽게 공석이 생겨 곤란했던 참이었습니다. 이번 대응도 그렇고, 적임자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한 도시의 지부장 자리. 게다가 사건 사고 비율이 높은 N시. 듣는 이에게 있어서 이 제안은 본인이 상정한 수가 아니었다는 듯 살짝 눈이 커졌다.
“⋯훨씬 특출난 인재가 많을 텐데.”
“저는 이즈루 씨를 믿고 있습니다.”
이미 한 차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올곧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자신이 놓쳤던 것을 떠올렸다. 더는 제 자리를 만들지 않은 리스트를 받으면서도, 대화의 끝에서 자리를 뜨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상대는 쭉, 기다리고 있었다.
센리 이즈루가 언젠가, 다시 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닻에 종속되기를.
그때까지 그의 짐을 본인이 감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서 익숙한 빛이 일렁였다. 열정과 신념이라는 이름을 띤 것. 망막 속 빛에 갇힌 남자가 끝끝내 쓴웃음을 지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자네도 전혀 변하지 않았군.”
~§~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 지부를 찾았다. 이제는 본부 에이전트가 아닌 한 도시의 지부장이 되었음에도 달에 한 번씩은 꼭 시간을 내었다. 구태여 이러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을까.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니 여태 보던 것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이란 짧고도 긴 시간이라, 그동안 피어나고 지는 인연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아끼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그랬듯이, 이들이 일상의 품으로 돌아오려 할 때, 자신의 존재가 아주 잠깐이라도, 작은 인연이자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또한 직접 살피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분위기 역시 존재한다. 묘한 기류, 내부의 신경전.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일 때 사건은 생기고 변수가 덮쳐온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선 꾸준히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뼈아픈 실책 이후 생긴 일종의 강박.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곳엔 그가 빚을 진 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회라는 이름으로 재차 희망을 보여주었으며, 변치 않는 믿음으로 붙잡아준 이가.
그러니 이것은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하는 지지에 가깝다.
오가는 걸음 사이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고, 근황과 조언을 나눈다. 후회가 문득 솟아오를 때는 잃어버리지 않은 인연을 되새겼다.
그리하여, 다시 현재. 센리 이즈루는 감았던 눈을 뜬다.
재차 시계를 확인하면, 5분 남짓한 시간이 흐른 것을 깨닫는다. 순간순간 과거가 덮쳐오니.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그를 침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다짐이다. 상념을 떨쳐내고 손에 들었던 서류를 정리한다. 4시까지 마무리한다면 두어 시간 남짓 취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엔 다시 영업 준비에 들어가겠지.
그리고 또 겪어본 적 없는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매 순간이 새로울 것이며, 아무리 많은 예상을 해도 꼭 빗나가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괴로울 뿐인가 하면,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포기했던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
마침내 삶이 되어버린 것.
그렇기에 늘 최선의 수를 찾아 헤맸다.
끝내 이 닻에 자신을 묶어 던져,
책임 속에서 익사하더라도.
자신은 이 길을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사랑스러운 세상이, 자신이 택한 일상이다.